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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영

삼성을 성공신화 이건희 회장 어록과 삶

by 잡학천재 202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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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취임당시 삼성전자의 주가는 2만7000원, 시가총액으로는 약 4400억원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시총 순위는 10위권이었으며, 삼성 계열 상장사 시가총액을 모두 합해도 1조원을 갓 넘겼습니다.

현재 삼성의 시가총액은 544조로 전세계 시가총액 13위입니다.

고 이건희 회장의 시대에 삼성은 시가총액 4,400억에서 544조원으로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발자취와 그가 남겼던 말과 성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중앙일보

 

 

고 이건희 회장의 말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6개월 밤을 새워서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논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경영자는 또한 적어도 4, 5년 후의 일에 대해서는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1994년 6월 집무실에서)

"우리나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1995년 베이징 특파원 오찬에서)

"휴대폰 품질에 신경을 쓰십시오. 고객이 두렵지 않습니까? 반드시 한 명당 한 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1995년 애니콜 품질 향상을 강조하면서)

"경영자는 알아야(知) 하고 행동해야(行) 하며 시킬(用) 줄 알아야 하고 가르칠(訓) 수 있어야 하며 사람과 일을 평가할(評) 줄도 아는 종합 예술가로서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1995년 5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미래 국제포럼에서)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2002년 6월 ‘인재 전략 삼성 사장단 워크숍’에서)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2007년 전경련 회장단 회의 직후 기자들에게)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2010년 3월 24일 경영에 복귀하면서)

"기회를 놓치고 나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잘해서 만회하겠습니다’는 소용없다. 아무리 잘해서 만회가 되더라도 그건 당연한 것이지. 만회가 아니라 기회 손실이다."(2010년 3월 24일 경영에 복귀하면서)

 

 

타고난 승부사 기질

이건희 회장의 주변인들의 통한 일화에는 그의 승부사적 기질 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요즘 말하는 소위 '일진' 학생과 맞짱을 뜬 사건이 있었는데 싸움이 무승부로 끝났던 이야기(전 새누리당 고 홍사덕 의원)도 있고,

그가 일본 유학시절 2년 정도 레슬링을 직접 했고, 프로레슬러인 역도산을 직접 찾아갈 만큼 열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울사대부고 시절(1959년)에는 전국레슬링대회 웰터급으로 출전해 입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회사 경영 당시에도 에세이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이라며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노력없이 승리할 수 없으며, 모든 승리는 오랜 세월 선수, 코치, 감독이 삼위일체가 되 묵묵히 흘린 땀방울의 결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확실히 성격이 아닌 기질은 타고 나는것이며, 이러한 기질을 잘 발현시켜 준다면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도 조금은 더 긍정적이고 발전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후계자 결정

1977년 8월 삼성의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의 삼성그룹 승계가 처음으로 공식 언급 됩니다.

"삼성이 작은 규모의 기업이라면 위에서부터 순서를 따져 장남이 맡으면 되겠지만, 삼성그룹 정도의 규모가 되면 역시 경영능력이 없으면 안된다."

"장남(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성격상 기업 경영이 맞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 차남(이창의 전 새한그룹 회장)은 중소기업 정도의 사고 방식밖에 없기 때문에 삼성그룸을 맡길 수 없다. 그래서 아들 셋 가운데 막내(이건희 회장)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중앙일보

 

은둔의 제왕

이건희 회장은 경영당시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았고, 공직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유력 정치인과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으면서 공격적으로 삼성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런 모습에 이건희 회장 취임 10년째인 2003년 뉴스위크지는 이건희 회장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은둔의 제왕"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몰입과 사색

이건희 회장은 어떤 문제나 화두에 대해 해답을 찾을때는 몇날 몇주, 몇개월 동안 당시 집무실인 한남동 승지원에 칩거해 몰입과 사색을 통해 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한 일화로 1993년 삼성의 신경영 선언(2류 근성 척결) 다음날 사장단을 일본 오사카로 불렀다고 합니다.

"한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극복해보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면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말은 당시 삼성의 2류 근성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한 고뇌의 결과였다고 합니다.

 

몰입에 대한 일화로는 여러가지 있는데,

먼저 궁금한게 있으면 전문가를 찾아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던가, 수입 DVD 플레이어 수십 개를 밤새워 분해하며 깊이 파들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이러한 그의 몰입은 오디오, 자동차, 애견, 영화감상의 취미에도 전문가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니 분명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취미에서도 발현되는 그의 몰입의 경지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이건 경제적인 수준이나 단순한 의지나 잠깐의 호기심이나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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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반도체 신화와 초일류 기업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계기는 반도체에 대한 투자 결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대 이병철 회장마저 반도체 진출에 리스크가 크다고 인식하고 결정을 미뤘으나, 이건희 회장이 사비를 털어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전자와 반도체 분야에서는 전문 엔지니어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하니 초일류 기업을 꿈구면서 얼마나 이분야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후에도 반도체의 기술적 방식의 변화에도 직접 진두지휘하며 64M D램은 세계 최초 개발하며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왔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추진력에 더해 정밀한 지식과 글로벌 시각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영스타일을 통해 1987년 46세 나이에 회장으로 취임했을때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물론 고 이건희 회장의 경영 이면에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업의 실패, 그리고 불법 정치자금 사건 등 정경유착 관행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노조, 비노조 경영원칙도 많은 반발을 산것도 사실입니다.

공과가 분명하고 많은 평가가 엊갈리지만, 휴대전화 불량품을 소각처리한 일화나 인재발굴과 육성, 그리고 반도체 사업에 도전하고 강력하게 추진했 던 모습, 타성에 빠진 조직에 신경영 선언을 통해 조직의 체질을 개선시키며 삼성을 사상 최고의 기록적인 성과와 성장의 반열에 올린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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